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문단 편집) == 발단 == 이렇게 갈등이 심화되던 중인 [[1948년]] 3월 22일에 파키스탄의 국부가 된 [[무함마드 알리 진나]] 총독[* 총독이라는 직함을 쓴 이유는, 이 때 파키스탄이 명목상 [[영국]]의 [[자치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국왕을 왕으로 모실 뿐이지 내정에서의 자치권뿐만 아니라 군사권과 외교권도 독자적으로 가진 사실상 독립 국가였다.]이 동파키스탄을 방문했는데, 그곳 중심지 [[다카(방글라데시)|다카]]에서 모든 점에서 우월한 [[아리아인]]만이 파키스탄의 진정한 민족이라며 동파키스탄의 언어인 [[벵골어]]를 버리고 서파키스탄의 공용어인 [[우르두어]]만 쓰자고 연설해 벵골인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벵골인인 동파키스탄인들도 인종적으로 아리아인이다. 벵골인들이 당시 파키스탄의 다른 민족들보다 피부색이 짙다는 점에서 비롯된 차별의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 인류학자들 상당수가 현대인들의 [[인종주의]]가 사실 인종 간의 이질성보다 피부색에 맞춰져있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 이 발언은 단순히 벵골인들에게만 굽히라는 것은 아니었다. 서파키스탄에서조차 우르두어 화자는 독립 시점에서 7%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대부분이 토박이가 아니라 인도 땅에서 넘어온 [[실향민]]들인 [[무하지르#s-3]]들이었다[* 파키스탄 2위 언어는 28.4%가 사용하던 [[펀자브어]]였고, 7.1%는 [[파슈토어]], 5.8%는 [[신드어]]를 썼다.]. 즉 문화적 이질감으로 인한 분열을 우려한 진나[* 심지어 진나 본인도 우르두어를 외국어로 배운 사람이다. [[카라치]] 태생인 그는 이주민인 부모님으로부터 [[구자라트어]]를 모어로 익혔다.]로서는 무굴 제국 시절부터 공용어로 쓰이던 우르두어로 대동단결해서 이질감을 좀 줄여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연설의 전체 문맥은 통합을 강조하며 "한 나라가 되었으니 한 개의 언어를 쓰자"였다는 말도 있다. 기존 언어가 아니라 우르두어를 새로 공용어로 배워야 하는 것은 서파키스탄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찌보면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이 각각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갈라진 건, 우르두어를 국어로 삼는 정책이 성공한 쪽과 실패한 쪽으로 갈라진 거라고 볼 수도 있다.[* 오늘날 파키스탄은 우르두어가 국어인 것과 별개로 펀자브어, 신드어, 파슈토어의 사용을 금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독립 시점에서 파키스탄 국민의 55%가 모국어로 벵골어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인도 제국 시절부터 벵골어를 애호하던 벵골인들에게 생짜 외국어인 우르두어를 강요하는 것은 어려웠다. 1948년 2월 25일, 벵골 지도자 디렌드라 나트 두타[* 이 사람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힌두교도임에도 동파키스탄에 잔류했는데, 결국 후일 서파키스탄군에 의해 살해된다.]는 벵골어를 공용어로 지정해줄 것을 파키스탄 국회에 요청하였으나, 파키스탄 총리 리아카트 알리를 비롯한 서파키스탄 지도자들은 무슬림의 언어는 우르두어라는 이유로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3월 22일, 진나의 연설이 사태에 불을 지폈고 이 연설이 진나가 파키스탄의 총독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파키스탄을 방문해서 한 연설이었다. 그리고 이 연설을 한 진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년 9월 11일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벵골인들의 분노만 키운 채 세상을 떠났다. 아무튼 진나 총독의 우르두어 단일화 연설을 계기로 서파키스탄이 주도하는 파키스탄 정부는 동파키스탄에 우르두어를 강요하고, 동시에 [[데바나가리 문자]]로 표기하던 벵골어를 우르두어와 똑같이 [[아랍 문자]]로 바꿀 것을 강요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렇게 지독한 수준의 벵골어 박해가 이루어지자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사용해온 벵골어를 지키자며 벵골어 국어 운동(ভাষা আন্দোলন)을 벌였고, 1952년 2월 21일 다카 대학교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파키스탄 정부의 언어 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까지 벌어져 결국에는 시위대와 파키스탄군 사이에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독립 이후 방글라데시에서는 2월 21일을 [[국경일]]인 언어 운동 기념일(ভাষা আন্দোলন দিবস)로 기리고 있으며 [[유네스코]]에서도 벵골인들의 모국어를 지키기 위한 벵골어 국어 운동을 기념해 세계 모어의 날(International Mother Language Day)로 지정했다.] 1951년 10월 16일, 진나의 후계자 알리 칸 총리가 암살된 후 벵골인 총리 카와자 나지무딘(Khwaja Nazimuddin)이 총리에 선출되었으나 그는 1953년 4월, 서파키스탄인 총독 굴람 무함마드(Ghulam Muhammad)에게 일방적으로 해임당했고 벵골인들은 또 큰 충격을 받았다. 벵골어 국어 운동은 1954년 헌법 개정으로 벵골어가 우르두어와 함께 국어로 지정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1955년, 동벵골의 행정명칭이 동파키스탄으로 변경되면서 벵골인들은 발칼 뒤집혔다. 1961년에는 종교를 불문하고 벵골인들의 자랑으로 여겨졌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탄생 100주년 행사를 서파키스탄에서 타고르는 반파키스탄적이라고 매도하면서 벵골은 또 난리가 났다.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파키스탄 정부는 인도 프로파간다를 차단한다는 구실로 타고르의 작품을 금지처분하는 한편, 벵골어로 된 모든 도서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이 조치는 나중에 철회되었으나 1967년, 파키스탄 정부는 타고르 작품을 다시 금지하였고, 이에 분격한 19명의 동파키스탄 지식인들이 집단 항의한 것을 시작으로 시민저항이 벌어졌다. 이러한 벵골 문화 탄압이 이어진 것은, 벵골 문화에 대한 서파키스탄 측의 무슨 신념적인 증오나 적대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좀 두들겨패고 깔아뭉개면 벵골 문화 따윈 없어지고 벵골인들이 고분고분해지지 않겠냐는 무척이나 한심하고 편의적인 망상에 기반한 것이었다. [[미국]]은 서파키스탄 측이 벵골 문화에 심각할 정도로 무신경하고 무감각하다고 평가했다. 상황은 아유브 칸이 이끄는 군사독재가 수립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는데, 파키스탄 군부의 주축인 [[펀자브인]]들은 [[벵골인]]들을 열등한 존재이며, 벵골의 가치는 오로지 해외 투자 유치 및 무역에만 있다고 보았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심각한 경제적 착취를 당했는데, 1950~1955년 사이에 파키스탄 정부가 지출한 개발비의 20%만 동파키스탄에 쓰였으며, 1965년에는 조금 늘었으나 그래도 35%에 불과했다. 그리고 서파키스탄은 생산품의 40~50%를 동파키스탄에 강매하면서 사실상 식민지 시장처럼 써먹었고, 동파키스탄의 무역 흑자는 모조리 중앙정부가 압수해서 서파키스탄의 무역 적자를 충당하는데 썼다. 1950년대까지 동파키스탄의 1인당 수입은 서파키스탄의 2배에 달했으나, 1969년에 이르러서 서파키스탄의 1인당 수입이 동파키스탄보다 61% 높을 정도로 동파키스탄은 철저히 착취당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계기로 서파키스탄의 벵골인 차별에 분노한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들은 1949년 [[아와미 연맹]](বাংলাদেশ আওয়ামী লীগ)이라는 정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아와미 연맹당의 당수로 1948년 벵골어 국어 운동을 주도하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선출되었다. 아와미 연맹은 결성 초기에는 동파키스탄의 경제 개발과 파키스탄 중앙 정부의 동파키스탄 정책 개선을 요구하는 수준이었지만 1958년 아이유브 칸이 쿠데타를 통해 헌정을 뒤엎고 독재정권을 수립하면서 서파키스탄인이 권력을 독점해나가는 바람에 차별이 오히려 심화되고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의 격차도 더더욱 커지자 1964년에 들어서면서 동파키스탄의 완전 자치를 외치기 시작했고 1960년대 후반 아유브 칸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반정부 운동에까지 참여하면서 [[1969년]] 아유브 칸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1970년 11월 12일 동파키스탄 지역에 초대형 [[사이클론]] 볼라 호가 강타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최대 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각계에서 구호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정작 파키스탄 중앙정부는 구호에 굉장히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다. 사이클론 상륙 이전부터 경계령을 내렸던 인도와 달리 파키스탄에서는 당일에야 경계를 내려 피해가 커졌으며, 구호 작업에서도 경비행기, 수송기 정도만 동원할 뿐, 정작 필요한 헬리콥터는 보내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 핑계랍시고 댄 게 인도 정부가 영공 통과를 허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는데, 인도 정부가 아니라고 반박하자 헬리콥터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보내지 않았다고 말을 바꾸었다. 자연히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불만은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물러난 아이유브 칸의 뒤를 이어 파키스탄의 대통령이 된 야히아 칸은 권력을 민간 정부로 이양할 뜻을 밝혔고 이듬해인 [[1970년]] 치뤄진 민정 이양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 확대를 주장했던 아와미 연맹이 동파키스탄 지역 선거구를 거의 석권해 총 의석 313석 가운데 167석,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획득하는 압승[* 지역구 300석을 인구 비례에 따라 동파키스탄에 162석, 서파키스탄에 138석을 배정해 놓았는데 딱 2곳을 제외한 동파키스탄의 160개 선거구에서 아와미 연맹이 승리했다. 여성 국회의원을 위해 추가로 둔 13석 또한 동파키스탄으로 배정한 7석을 전부 아와미 연맹이 차지했다.]을 거두었고, 이대로라면 단독집권이 가능했던 상황이었다. 이에 제2당으로 88석을 차지한 [[파키스탄 인민당]] 당수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아와미 연맹과의 협상에 나섰는데 그는 파키스탄 인민당이 '정치적 핵심'인 펀자브와 신드에서 이겼으며 다수당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함으로 아와미 연맹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1971년 1월 5일에 부토는 자신이 아와미 연맹과 연립정권을 수립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면서 협상에 나서려 했으나, 동파키스탄에 대한 자치권 부여에 대해서 반대했다. 부토는 서파키스탄의 다수당인 파키스탄 인민당과 동파키스탄의 다수당인 아와미 연맹이 권력을 나눠가질 것을 제안했으나, 무지부르 라흐만은 제1당인 아와미 연맹이 권력을 독점해야 한다고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부토와 야히야 칸은 아와미 연맹의 조각을 늦추기 위해서 3월 3일로 예정된 국회 개원을 3월 25일로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이에 동파키스탄 전체에서 항의와 총파업이 이어지는 등 정국은 극단적으로 치달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